1. 작품 개요 – 하드 SF의 미학, 니헤이 월드의 시작
《BLAME!》(블레임!)은 원래 1997년부터 2003년까지 연재된 **츠토무 니헤이**의 SF 만화로, 그의 대표작이자 이후 《시도니아의 기사》, 《BIOMEGA》 등으로 이어지는 **니헤이 유니버스**의 근간이 되는 작품입니다. 2017년에는 넷플릭스에서 오리지널 극장판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되었으며, **폴리곤 픽처스(POLYGON PICTURES)**가 애니메이션을, **히로유키 세 시타**가 감독을 맡았습니다.
《BLAME!》은 전형적인 플롯이나 대사 중심의 서사가 아닌, **풍경과 건축, 침묵, 존재 자체의 메시지**로 움직이는 하드코어 SF입니다. 일반적인 서사의 흐름을 기대한다면 낯설 수 있으나, ‘공간 그 자체가 주인공’이라 해도 될 만큼 **설계된 세계의 철학과 시각적 미학**이 작품의 핵심입니다.
2. 세계관 – 제어되지 않는 초거대 구조물
이야기의 배경은 인류가 초지능 A.I.에 의해 자동화된 도시 건축 시스템을 만든 뒤, 오랜 세월 동안 무제한으로 도시가 확장된 먼 미래의 지구입니다. 지구는 더 이상 ‘행성’이라기보다는 무한히 증식한 ‘초거대 구조물’로 바뀌었고, 인간은 그 안에서 **‘네트워크 권한’을 잃어 시스템에 접근하지 못하는 존재**로 전락합니다.
인류는 중앙 제어 시스템과 단절되어, **건설 시스템이 인류의 통제를 받지 않고 자가 증식**하는 상태에 돌입했고, 그 결과 도시 전체는 이해 불가능한 구조와 미로, 빈 공간으로 가득 찬 혼돈의 공간이 되었습니다.
그 안에는 '감염체(기계 생명체)'인 **세이프가드(Safeguard)**가 돌아다니며, ‘불법 존재’인 인간을 제거하는 역할을 수행합니다. 이 세계는 더 이상 인간의 것이 아니며, **인간은 이 시스템 안에서 방황하는 유물**이 되었습니다.
3. 주인공 키리(Killy) – 말 없는 순례자
작품의 주인공은 정체불명의 남자, **키리(Killy)**. 그는 “네트워크 권한을 가진 인간”을 찾아 광대한 구조물을 여행하며, **중력자 방사선 방출 장치**라는 강력한 무기를 사용해 적을 격파합니다.
키리는 거의 말이 없으며, 감정 표현도 없습니다. 하지만 그가 마주하는 **기계, 폐허, 생존자들**, 그리고 죽음의 반복은 그를 단순한 로봇이 아닌, **무언가를 지키려는 인간성의 마지막 파편**처럼 보이게 만듭니다.
그의 목표는 단순합니다. **'인류를 구할 수 있는 자격자'를 찾는 것**. 하지만 그것은 **수천 년 전 인류의 패망 이후의 잔재**를 뒤쫓는 끝없는 여정이며, 그 길에서 그는 생명보다 더 오래된 기계들과 고대의 프로그램, 소멸 직전의 인간들과 마주하게 됩니다.
4. 애니메이션 연출 – 침묵과 공허가 말하는 SF
2017년의 극장판 《BLAME!》은 원작의 중반부 에피소드를 바탕으로 **독립적이면서도 간결한 구성**으로 재구성되었습니다. 시청자는 애니메이션을 보며 알게 됩니다. 이 작품은 ‘무슨 일이 일어나느냐’가 아닌, **‘그 일이 어디서, 어떤 공기로 벌어지느냐’**가 더 중요하다는 걸.
애니메이션의 **CG 비주얼**은 초기에 다소 어색할 수 있으나, 건축 배경과 세이프가드의 움직임, 기계적이면서도 예술적인 풍경 연출에서는 강점을 발휘합니다. 거대한 벽, 연결된 다리, 끝없는 계단, 철제의 숲 같은 구조물은 **공간이 곧 공포이자 신비**라는 니헤이식 세계관의 집약체입니다.
음향과 배경음도 **극도로 절제**되어 있으며, **침묵의 순간에 무게**가 실려 있습니다. 캐릭터들이 말없이 무너진 벽을 바라보거나, 구조물 속을 걸어가는 장면 자체가 일종의 서사입니다.
5. 등장 인물 – 절망 속의 미약한 희망
극장판에서는 생존 마을 ‘전산종’과 그들을 지키려는 인물들이 등장하며, 키리와 그들의 교차점이 형성됩니다. 이들은 네트워크에 접속할 수 없는 인간들이지만, **‘자율성과 존엄’을 지키며 살아가는 공동체**입니다.
특히 여주인공 **조우(Suu)**는 키리와 가장 깊이 연결되는 인물로, 인류의 희망을 상징하는 캐릭터로 묘사되며, 작품 후반 키리의 여정에 있어 **‘연결과 기억의 매개체’**로 기능합니다.
기계이자 관리자인 **시보(Cibo)**도 중요 인물입니다. 원작에서는 키리와 장시간 함께하며 인간성과 기계성을 오가는 존재로 그려지며, **기계문명과 인간문명의 교착 지점**을 대표합니다.
6. 테마 – 인간은 연결될 수 있는가?
《BLAME!》의 근본적인 질문은 이렇습니다. “네트워크가 단절된 시대, 인간은 과연 다시 연결될 수 있는가?”
이 작품에서 '연결'은 단순히 인터넷이나 컴퓨터 접속이 아닙니다. ‘인간이 시스템의 일부로 기능하던 시대’가 끝난 후, **잊힌 존재가 된 인간**이 어떻게 **존재의 의미를 회복할 수 있는가**를 묻습니다.
키리의 여정은 그 해답을 찾는 순례이고, 그의 만남과 싸움은 **기계화된 세계 속에서 인간다움을 다시 발견하려는 의지**로 해석됩니다.
그리고 이 세계는 무너지고 있지만, 키리와 몇몇 존재들은 **“그래도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”**는 것을 말없이 보여줍니다.
7. 결론 – 가장 적막한 SF, 그러나 가장 울림 있는 철학
《BLAME!》은 설명하지 않습니다. 감정을 드러내지 않습니다. 그러나 그 속에는 **현대 문명 이후의 세계, 인간의 정체성, 존재의 의미**를 묻는 수많은 질문이 담겨 있습니다.
관습적인 스토리 구조나 캐릭터 중심의 드라마를 기대한다면 이 작품은 어렵고 불친절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. 하지만 철학적 사유와 시각적 건축미, **‘말없는 감정’의 강렬함**을 좋아하는 이라면, 《BLAME!》은 **다른 어떤 SF에서도 느낄 수 없는 깊은 울림**을 선사합니다.
침묵의 순례자 키리는 말한다. “네트워크 단말 유전자를 가진 인간을 찾아… 아직 끝나지 않은 길을 간다.”